ID: 730128
에레슈란타 탐험 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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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 1
생명력: 63
공격 반경: 0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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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지로 남겨진 어비스는 천족의 큰 짐이다.

- 아문데르


어디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하는 것이 좋을까?

요즘의 젊은 데바들은 키스크 없이는 전투에 나가려 하지 않지만 데바들이 소멸을 두려워하지 않던 시절이 있었다.

천계를 위해, 사랑하는 자를 위해, 자신의 명예를 위해 소멸을 두려워하지 않고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비스를 헤치고 나갔던 빛과 같은 사람들이 있었다.

나의 이야기도 그렇게 살았고 혹은 그렇게 사라진 사람들의 이야기다.

내가 막 데바로 각성했던 무렵은 수많은 어비스가 발견되기 시작하던 시기였다.

여기저기서 발견되는 어비스에 관한 다양한 정보가 홍수처럼 쏟아지자 데바들은 정신이 다 혼미할 지경이었다.

그중에서도 데바들이 가장 많이 관심을 가졌던 어비스는 바로 에레슈란타였다.

에레슈란타가 고정 어비스라는 사실은 발견 초기부터 알려져 있었지만 막상 용감하게 탐험하러 가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수많은 어비스가 갑자기 닫혀 버렸기 때문에 에레슈란타도 그렇게 되지 않을까 하는 불안이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에레슈란타에 오드와 자원이 풍부하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본격적인 탐색과 개척이 시작됐다.

짧은 기간 동안 많은 탐사대가 에레슈란타로 출발했고 나도 그 가운데 하나였다.

지리의 데바로서 내가 받은 임무는 에레슈란타에 안전한 천족의 요새를 건설할 땅을 찾는 것이다.

그리고 개인적인 목적도 있었다. 스승이었던 일데나 님이 남기고 가신 지도를 완성하는 것이다.

일데나 님은 저명한 지리의 데바였다. 전투에는 전혀 소질이 없었지만 새로운 지역에 대한 열정이 강했기에 틈만 나면 에레슈란타로 가서 지도를 그려 오시곤 했다.

내가 탐사대에 지원한 것도 어느 정도는 그분의 영향이었다.

몇 차례 에레슈란타로 가서 가시적인 성과를 내자 일데나 님은 그곳의 지도를 만드는 데 집중하기로 결심하신 것 같았다.

지도를 완성하겠다며 의욕적으로 떠났던 길이 마지막이 될 줄은 몰랐다.

그래서 일데나 님이 만든 에레슈란타의 미완성 지도를 소중히 큐브에 넣고 나도 에레슈란타로 가는 길에 오르게 된 것이다.

탐사를 하는 동안 모닥불을 피우고 잠자리에 들기 전이면 항상 지도를 펼쳐 들고 보고 또 보고 마음속으로 기도했다.

'일데나 님, 영혼이 되어 어비스의 어딘가에 계신다면 저에게 힘을 주세요.'

소규모 어비스나 유동 어비스의 탐색에 참가한 경험이 있긴 했지만 에레슈란타처럼 큰 어비스에서의 임무는 처음이었다.

다른 탐사대원도 나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경험자로 구성되긴 했지만 에레슈란타에 대해 자세히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래도 앞서 탐험한 이들의 희생으로 얻은 정보가 있었기에 우리는 초창기의 탐사대보다는 훨씬 형편이 나은 셈이었다.

우리 탐험대는 일데나 님의 지도에 의지했다. 하지만 지도는 부유도의 위치와 크기만 대강 그려져 있었을 뿐 상세한 정보는 거의 없었다.

영원한 생명을 희생해서 만들어 낸 일데나 님의 지도는 슬프게도 믿을 만한 길잡이가 되지 못했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새롭게 다짐하곤 했다. 일데나 님이 못다 한 작업은 내가 반드시 마치고 말 것이다.

에레슈란타를 개척하는 과정에서 희생된 것은 천족뿐만이 아니었다.

영혼과 용족의 잔해가 즐비한 황폐한 땅을 지나다가 썩고 바스러져 신원을 알 수 없는 몇 구의 시신을 발견했다.

흩어져 있는 잿빛 갈기와 검은 깃털을 보니 마족이 틀림없었다. 주변에는 탐사에 사용한 것 같은 부서진 장비와 알 수 없는 글씨가 빼곡히 적힌 작은 노트가 있었다.

그러나 우린 적의 불행을 기뻐할 수 없었다. 결코 남의 일이라고 할 수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동정심을 발휘해서 마족의 시신을 모래흙에 묻고 봉분에 노트를 얹어 주었다.

불길이 이글거리는 땅을 걸었다. 유령이 득실대는 땅도 걸었다. 용족의 독기로 오염된 땅도 걸었다.

쓸데없이 힘을 소모하지 않기 위해 꼭 필요한 상황이 아니면 날개를 펴지 않았다.

음식과 식수는 금세 바닥을 드러냈다. 붕대와 물약, 마법 용품은 이미 떨어진 지 오래였다.

보급대와 연락을 취하려고 했지만 보급대가 에레슈란타에서 진입한 이후 연락이 끊어졌다는 소식이 들렸다.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어비스에 사는 정체를 모를 생물을 사냥해 식량으로 삼아야 했다.

오직 육감과 신에 대한 믿음에 의지하여 탐사하던 어느 날 거대한 유적지를 발견했다.

엄청나게 큰 규모의 유적지였다. 더구나 인테르디카 고대 유적에서 아주 희귀하게 발견되는 유물과 양식이 비슷했다.

탐사대원 중 고고학자였던 데바는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에레슈란타에 온 후 그가 웃는 것을 처음 보는 것 같았다.

하지만 학문적 발견의 기쁨은 잠시였고 우리는 임무를 다하기 위해 떠나야 했다.

고고학자는 오랫동안 고민하더니 그곳에 남기로 했다. 평생을 바쳐 연구할 가치가 있는 곳이라면서 말이다.

지치고 식량도 부족했기 때문에 우리는 그를 유적지에 남겨 두고 왔다.

우리는 매우 지쳐 있었다. 인원은 처음 도착했을 때에 비해 절반도 되지 않았다.

큐브에 남은 휴대용 키스크는 딱 하나뿐이었다. 엘리시움의 천재 장인과 신관들이 힘을 합쳐 만들어낸 시험작 중에 마지막이었다.

하나는 이미 용족과의 싸움에서 사용했고, 다른 하나는 비행 도중 운석에 휘말렸을 때 부서졌다.

또 하나는 용족과 싸울 때 설치하기는 했지만 제대로 동작하지 않았다. 그 싸움에서 몇 명의 대원들이 소멸했다.

아직 시험 단계라서 완전하지 못하다는 경고를 듣긴 했지만 참으로 불행한 사건이었다.

그저 마지막 남은 키스크가 불량품이 아니길 기도할 뿐이었다.

유적지를 벗어난 후 우리는 세로로 길게 연결된 섬들을 발견했다. 처음 도착했던 곳에 비해 아주 낮은 곳에 있었다.

섬을 따라 아래쪽으로 내려온 후 잠시 쉬어가기 위해 야영 준비를 했다. 하지만 휴식을 취하다 말고 우리는 급히 달아나야 했다.

침묵에 싸인 섬에 잠들어 있던 고대의 원혼들이 살아 있는 자의 낌새를 느낀 것이다.

놈들은 무방비 상태였던 우리에게 일제히 덤벼들었다. 우리에게 달려든 영혼이 천족인지 마족인지도 분간할 수 없었다.

야영 장비와 짐을 버리고 달리다가 부유도의 끝에 도착하자 날개를 펴고 날아올랐다.

날개에 힘이 점점 사라져 갔다. 몇 초 후면 더 이상 비행할 힘이 없어 추락할 것 같았다.

이대로 소멸하는 걸까... 어비스에서 소멸하면 오드의 흐름으로 돌아갈 수는 있는 걸까...

한계에 다다르자 머릿속으로 수많은 생각이 스치고 지나갔다. 그때 눈앞에 다른 부유도가 보였다.

날개의 힘이 한계에 이른 상황이었기 때문에 어떤 곳인지 파악할 여력도 없이 착지했다.

우리가 추락하듯이 착지한 섬에는 따뜻하고 부드러운 바람이 불고 있었다.

고개를 들자 분홍빛의 꽃잎이 얼굴에 닿았다.

천계에서 익숙하게 보던 꽃비였다. 그것이 환상인지 아니면 이미 소멸한 후라 사후 세계를 보고 있는 것인지 헷갈릴 지경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환상이 아니었다. 우리에게 꽃비를 뿌린 것은 거대한 시포라 나무였다.

시포라 나무는 암석처럼 보이는 부유도 한구석에 박은 채로 당당하게 서 있었다. 분홍빛의 꽃을 가득 피운 채 말이다.

지금은 찾아보기 힘들지만 일년 내내 분홍빛의 꽃을 피우는 시포라 나무는 아트레이아가 낙원이었던 시절에는 어딜 가든 흔히 볼 수 있는 나무였다고 한다.

대파국 이전의 완벽했던 아트레이아를 연상시키는 거대한 시포라 나무가 있는 부유도를 발견한 것이다.

부유도를 찬찬히 탐사한 결과 그곳이 천족의 요새를 세울 최상의 장소라는 것을 알게 됐다.

엘리시움에 상황을 보고하자 테미논 요새의 건설은 아주 빠르게 진행되었다. 마족에게 뒤처질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엘리시움을 조급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테미논 요새에 키벨리스크가 세워지고 주신의 축복을 받은 결계막이 쳐진 후에는 나도 여유롭게 지도를 완성할 수 있었다.

잔해의 섬이라고 불리게 된 유적지에 남은 고고학자 친구도 무사히 살아 남아 지금까지 고대도시 루에 관한 연구를 하고 있다.

지금은 아득한 과거의 추억이 되었지만 당시 우리에게는 한 걸음 한 걸음이 목숨을 건 처절한 사투였다.

어비스 진출 초창기에 모든 것을 희생한 데바들이 있기에 지금의 에레슈란타와 테미논 요새가 있다는 것을 젊은 데바들이 기억해 줬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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